
가쓰라야마 백두대 사이가 한반도 허리를 넘어 서남쪽으로 달려와 그 성가신 숨을 고르고 머무르는 곳이 계류산이다. 그 자리가 드물지 않아 신라 때부터 풍수학자들이 한국의 명산으로 꼽혔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모여 있는 현상은 은계산이 얼마나 영험이 있는지에 대한 방어이며, 나라의 마을에서 물망에 오르는 것도 몇 번이다.
계류산은 주봉의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형제봉 등 20여개의 봉으로 구성되어 높이는 845m이다. 전체의 능선이 마치 닭의 벼를 사용한 용의 형태라고 하며 계류산이다. 정감록에서는 여기가 큰 혼란을 피할 수 있는 도카치지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도망 사상 때문에 한때 신혼 종교 및 유사 종교가 성행했다. 한정갑 <사찰문화유산 응답기>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 위치한 고지는 동학사, 신원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원으로 유명하며 국보 1점과 보물 4점, 지방문화재가 10점이나 있다.
카이의 길은 풍치가 넘친다. 오리의 숲이라고 불리는 고지 진입로는 아름다운 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으며, 계절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연출하지만 오래전부터 「하루마야」 「아키코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키코지」의 진지한 눈길을 보고 싶다면 가을에 찾는 것이 좋다.
일주문을 지나 풍정 넘치는 갑옷 진입로를 걸어보니 최근 복원해 세월 때가 끼지 않는 사천왕문이 기다리고 있다.
고지는 근세에 일주문과 천왕문을 조성하고 널리 포장된 길을 통해 대웅전에 들어가는 진입로를 새롭게 조성했다. (사진상 왼쪽의 길)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코스로 소개합니다.
갈라진 길에서 조금 걸으면 코지가 그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푸른 鷄龍甲寺라는 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현판은 고종 24년(丁亥)에 충청감사로 온 홍재희가 쓴 모양이다. 그 시대의 문자답게 예상되는 문자로, 추사서파에 속하는 문자임을 과시한다. 그러나, 과도한 전율과 변화가 없는 사이 가결구는, 아직 추사체의 요체를 획득하기에는, 요원의 경지에 있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최완)
고지 동종(동종) 명문을 보면 선조 16년(1583년) 여진족의 침입으로 가미시마(전라, 충청, 경상) 사찰의 철기를 담아 무기와 화포를 만들면 고지 동종도 징발되는 바람에 주상을 축하한다. 고지 동종은 주조연대가 확실하고 만든 사정이 명문에 남아 있어 임진왜란 전후 조선동종 양식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계류산 고사의 범종각에 달려 있는 이 범종은 높이가 1㎝에 달해 이 시기에 만들어진 종 중 가장 큰 크기이다. 꼭대기에는 한 몸으로 이어진 두 마리의 쌍용으로 구성된 연뉴가 배치되었지만, 음통이 표현되지 않은 것은 전시기부터 내려온 중국종의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종소리로 지옥을 깨고 지옥의 중생을 구출해 내리는 지장보살의 서원을 상징한 장식 문양일 것이다. 종신에 음양각 종종이 많이 새겨져 있으며 종의 주조 유래를 밝히고 있으므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11년(선조 16년, 1583) 7월에 북도 이적의 난이 대기에 시모조도 사찰의 철기를 모두 거두고 나라에 바쳐 무기와 무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적지 않은 대사찰로 아침 저녁 주상을 위해 축수하는 곳인데, 때때로 무안하다고 다들 한숨 빨리 권하고 갑신년(선조 17년, 1584) 여름 4월 공산동 계류산 고데지에서 대종을 새롭게 주조한다. 만세에 유전하십시오. 조상 에 여진족 나탄게 유보리 등이 기병 2만여기를 거쳐 침략한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 주종 명문 내용은 사실과 일치하는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코지 동종에는 용 끈, 종의 꼭대기 부분 장식이 있어, 타치바나 돌기 장식과 구유가 당초 문방형대 안에 돌출되어 나온 4구의 유성이 있고, 그 아래에는 연화문형의 당좌가 운문 위에 각각 4개씩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의 길을 따라 본격적으로 갑자기 경내에 들어가 보자.
고지의 옛 이름은 고지, 고지사, 가쓰라 류코지 등으로 고지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고구려의 스님 애드상이 신라 최초의 사원인 도리이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의 지계룡산을 지나 산중에서 상해의 빛이 하늘까지 뻗어 있는 것을 보고 찾아보면 바위가 몇 개씩 싸여 만들어진 자연석탑에 신진지가 봉 이에 애드화상은 그 자연석탑을 천진보탑이라고 부르며 고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신라마 최지원은 십산십찰을 거론해 당시 크게 불법을 가르쳤는데 10개를 꼽았지만, 지이산 화엄사, 태백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김정산 범어사 등과 함께 계룡산 고사를 언급했다.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천여강 단우를 중수하며 전국 10대 화엄사 중 하나로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조상 30년) 때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가 있었는데 병란으로 많은 전각이 사라졌다. 조상 때 대웅전과 진해당 등 일부 전각을 중건해 몇 번의 개수와 함께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5간, 측면 3사이의 다포집이지만 정유재와는 당시 고사가 전소된 후 조조 37년의 고진(1604)에 진해당과 함께 처음으로 중건을 낸 건물이라고 한다. 이후 효종 4년의 계사(1653)에 충청도 관찰사, 설봉강백년과 히메 목사 신주쿠의 도움으로 대중창 불사를 이루는 가운데 크게 개수했다고 한다. 현존 건물은 그때 개수한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웅전의 현판문에는 ‘강희 8년 기유 6월 일서(강희 8년 기유 6월 일서)’라는 관서가 있어 현종 10년(1669)에 쓰여진 것을 가르쳐주지만 석봉체계통의 명필이다. 진경문화가 꾸준히 잡아간 시기이므로 이렇게 조선 고유색의 짙은 훌륭한 문자를 내보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대웅전에 들어가 불전에 배례하고 성상을 배관하면 삼불사보살이 모셔져 있다. 중앙의 석가, 동방약제사, 서방미타의 산케이여래와 문수, 보현, 관음, 세지의 4대 보살과 같다. 불상은 모두 왼쪽 위로 되어 있으며, 보살상은 입상인데 보살상의 신장이 불상의 어깨에 이른다. 불단을 높였기 때문이다. 상고에서 밖에 얻지 않으면 오히려 보살상이 큰 듯한 느낌이다.
내부는 석가모니불과 약사부처, 아미타불을 모신 산존불로 구성됐다. 주불인 석가모니블의 좌우 보상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하며 별도 후 불당화를 갖췄다. 약제사불과 아미타불은 협시 보살이 없는 1존화이지만, 각각 후화탄화를 갖추어 위엄을 높인다.
불단의 뒤에는 국보의 고지 산신촛불을 괘선의 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다. 벽돌 자나블을 중심으로 석가모니와 노사채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촛불이다. 이 촛대는 길이 미터, 폭 미터의 크기로 전체를 위·중·하 3단으로 나누고, 상단에는 관음 보살과 오세데라 보살, 제자, 금강 역사 등을 그려, 안에는 삼신불을 크게 강조해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문수보살과 보살보살, 사천왕 등을 묘사했지만, 녹색·홍·황색과 같은 중간색조와 금색으로 채색해 화면 전체를 매우 밝고 화려하게 구성했다.
후불 당화는 각각 삼계여래의 배후후벽에 일폭씩 따로따로 걸려 있지만, 옹정 8년(영조 6년, 1730년)의 연기가 있어 진경문화 정상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모시지에 그린 것으로, 세로 455센티미터, 가로 280센티미터의 크기이다. 화원의 이름은 거의 읽기 어렵지만, 취상, 명선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진경시대의 절정기답게 불화기도 매우 뛰어나며, 채색은 화려하고 필법은 정치하고, 상호는 원만 단정하고, 구성은 깊이와 질감을 겸비해, 상처 하는 곳이 한 곳도 없다.
불벽 뒤에 이이가 걸려 있지만 그 반자걸이의 목각이 보물이다. 당사자가 하엽 위에 쌍용쟁주의 형태를 담당하고 있는 형태로, 반자는 쌍용이 만들어낸 타원형 공간에 달려 있다. (최완)
대웅전 왼쪽 구석에 금고걸이라는 드문 유물이 있다. 나무로 닦은 호랑이 위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향해 타원형 공간을 만들고 금과 같이 생긴 철의 북쪽을 걸었다.
경내 곳곳에 감나무를 많이 심어두면 가을이라면 가지가 찢어질 듯 매달린 감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월인석보목판 매우 귀중한 자료로 꼽히는 월인석보는 월인천간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 간행한 책으로 석가의 일대기와 공덕을 칭찬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재의 정식 명칭이 「선조 2년간의 월인석보판본」인 이 목판은, 1569년(선조2) 충청도 한산 다케야마리 백개만의 집에서 각각 논산 쌍계사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옮겨 왔지만, 현재 46장의 판목이 남아 있다.
관음전 관음전 안으로 들어가면 천여 개의 작은 불상과 함께 관세음 보살자상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하고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어려움에 빠진 중생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도움이 필요한 중생들에게 자비의 손을 베는 보살이다.
고지에서 동학사로 향하는 가장 편하고 빠른 길인 용문 폭포와 김초 고개를 넘어 형제탑에 내리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용문 폭포와 신흥암을 거쳐 약 3km 정도 이어진 카이 계곡은 여름철에는 더위를 식히는 것으로 겨울철에 풍치를 즐기기에 최적이다. 해발 620m의 계룡산 금초 고개를 넘어 동학사에 이르는 산길은 가족과 함께 극복한다. 별명 고사 계곡으로 불리는 이 길은 계룡산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고지에서 3시간이라면 동학사에 이른다. 가을에 이 길을 찾는 여행객이 모일 만큼 계곡의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 고지에서 금초 고개에 이르는 고지 계곡 구간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김초 고개를 거쳐 동학사에 나오는 가벼운 산행 일정을 취할 수도 있다. 몸을 열심히 움직이면서 마음을 문지르는 고지 템플스테이는 가을이라면 소풍을 나온 것처럼 기분 좋은 여유를 선사한다.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갑자기 옛 길을 내려 마음을 깨닫는다. 가을의 낙엽이 사각일 때 번뇌를 씻으러 돌아오면, 인연은 마음으로 느끼지만 발걸음으로 먼저 다가간다는 생각과 함께. 유철산 <아름다운 사원여행>
약사전 이 관음 보살 입상은 원래 도공탑 위의 천연감실 속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백제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으로 두원관과 함께 고부조로 조각된 머리가 어깨선을 따라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붙여 보기 좋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약제사 여래 입상은 별장 위 다리 위의 석굴 속에 모셔져 있지만 고려 초기 조성처럼 의습 표현이 과장되었지만 외모는 사실성이 강조된 원만 상호로 매우 친근감이 간다.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세우고, 왼손은 같은 높이로 약호를 가지고 있다. 영험이 있었는지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자, 갑자기 옛날 길을 걸어보자. ▶2편으로 연결됩니다.
references 최완수 <명찰순례> 한정갑<사원문화유산의 회답기> 이호일 <우리 절에서 역사적으로 쉬고 온다> 최은천 <한국 카테고리> 유철산 <아름다운 사원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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