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문 1414년(태종 14년) 충청병마절도 사영이 도쿠야마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어 1417년(태종 17년)에 축성을 시작해 1421년(세종 3년)에 축성이 완료되었다. 우미읍성은 원래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주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조 때 군사제도가 진관체제로 개편되면서도 이 역할은 여전히 충청도 지역의 주요 군사거점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1651년(효종 2년)에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해 하미현 관저가 옮겨 해미읍성이 되어 문무를 겸한 겸령장이 배치되어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뀐 후 호서지방행정중심지 역할을 했다. 우미미읍성이라는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의 이름은 우미미유성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과 앞을 향해 식당가에서 솔론탕을 먹고 구경에 나섰다. 비가 오락하는 해미읍성을 우산을 펼쳤다.
진남문 안쪽의 두석에는 황명홍지 4년 신조조라고 적혀 있지만, 황명홍치는 명효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말하며, 4년 새해는 1491년 은정 22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문장을 통해 읍성이 완공된 시기는 1421년(세종 3년)이므로 아마 진남문을 수리해 완공한 것이 149.
해미프슨 동헌의 옥사
히가시겐 출입문에는 호서 좌굴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있다.
관리와 가족이 생활을 살린 살아있는 집인 內衙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귀빈이 묵는 숙소인 객배
하미읍성의 서문인 枳城樓 성 주위에 가시가 많은 많은 동백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해미읍성을 「탄자손」이라고도 한다.
서문에서 탄자 나무를 넘어 바라본 관저와 객사 방향
활력
우미읍성의 북문에서 암문의 형태로 되어 있어 앞에는 垓字도 보인다.
정호정(淸虛亭)
우미미읍성의 동문인 설양원
18년 전에 방문했을 때 활발히 조성 중이던 마을의 모습이다.
떡집에서 떡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역사 (구력 ) 고종이 종묘에서 독립서 고문을 고했다. 고종은 종묘에서 독립서 고문을 발표하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밝혔다. 이렇게 보면 고종이 굉장히 보이지만 이는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의 압박 때문이다. 1926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앞 신청사로 이전한다. 1948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북총선을 위해 인구조사를 하고 한국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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